제9부
다시 걷는 사람
2019~2026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멀리 볼
수 있었다."
— 화광동진
제60장. 중리동 다가구
2019년 가을. 한국법무보호공단 대전지부에서 연락이 왔다.
LH에서 배정받은 법무부 몫 중에 중리동 다가구 주택 주인 세대가 났다고 했다.
탈북 여성 단체 쉼터로 이용되던 세대였다. 보통 작은 평수밖에 없는데 큰 평수가 난 것은
드문 일이었다.
부탁에 부탁을 해서 배정받았다. 보증금 1,100만 원, 월 14만 원. 방 4개에
화장실이 2개 달린 가성비 좋은 집이었다.
숙이가 말했다.
"어떻게 호주머니 3천 원이 이 보증금을 만들었대?"
"알면 다쳐."
숙이가 웃었다. 오래간만에 편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2019년 12월 1일. 중리동으로 이사했다. 집이 생겼다.
보증금은 빌렸지만 내 공간이 생겼다. 그것이 출발이었다.
* * *
눈이 문제였다.
교도소 안에서 3년 내내 어두운 조명 아래 책을 읽은 댓가로 백내장이 왔다. 사물이
흔들려 보였다. 지게차 교육 실기에서 떨어진 이유도 그것이었다. 파레트
구멍에 발을 맞추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렸다.
노병태 회장이 타시던 산타페를
주셨다. 그런데 주차하고 빼는 과정에서 접촉사고를 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됐다. 의료보험으로 지원되는 수술을 받았다. 왼쪽
눈.
수술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세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선명함이 눈물이 나게 고마웠다.
제61장. 경원뷰건설 — 현장에서 배운 것
2022년 11월. 경원뷰건설에서
컨설팅을 시작했다.
건설 현장의 구조를 가장 가까이에서
봐야 했다. 시공, 인허가,
자금 흐름, 현장 관리. 책상 위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현장이 열리면 함께
나갔다. 현장소장과 대화하고, 공정을 들여다보고, 문제를 찾았다. 과거 수백억 프로젝트를 지휘하던 경험이 이제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위에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안에서
함께 풀어가는 것이었다.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감추고 티끌과 함께한다.
그것이 말이 아니라 몸이 됐다. 현장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문제를 그들의 자리에서 들었다. 법률 문제를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아는 것을 말해줬다. 임금 체불, 산재, 계약 분쟁.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것이 기뻤다.
2024년 1월까지 1년 3개월. 그 경험이 이후 브이씨이티 전무직과 우솔감정평가법인 본부장의
실질적인 토대가 됐다.
제62장. 브이씨이티 전무
2023년. 스마트팜과 강구조물 제작 회사에서 전무 자리를 제안받았다.
비제이솔루션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사명을 바꾼 그 회사였다. 연매출 300억이 넘는
스마트팜 선두주자의 하청업체로 성장한 곳이었다. 그런데 드림팜이 부도나면서 18억의 미수채권이 묶였다. 원청 건설회사도 회생을 신청하면서 4억이 추가로 묶였다.
사업 포기 위기였다.
나를 필요로 했다. 부지 선정부터 인허가, 금융, 시공, 준공까지. 그 전 과정을 손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2년간 그 일을 했다. 사업 포기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다수 재기시켰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2025년. 전무직을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 이정호 회장을 만났다.
* * *
이정호 회장은 전주 법조·건설계에서 오래 인연을 이어온 분이었다. 나의 이력을 흠으로 보지
않고, 현장과 법리를 동시에 읽어낼 수 있는 안목으로 봐주신 분이었다.
"주 실장, 우리 법인에서 일해봐요. 부동산 권리분석이랑 NPL 쪽에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우솔감정평가법인이었다. 본부장 자리였다.
NPL. 부실채권. 나는 그것을 책상 위에서가 아니라 법정에서, 교도소에서, 현장에서 배웠다. 어떤
법무사나 감정평가사보다 실체적인 경험이 있었다.
"해보겠습니다."
제63장. 물한계곡
충북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계곡 300미터를 사유지로 끼고 있는 임야 7,000평. 2021년 6월, 모던밸류㈜
이름으로 이 땅을 샀다.
임병태 회장과 아들 임상균, 박문호 지점장, 이경미 상무, 성현이, 그리고 숙이가 주주 겸 이사로 등재됐다.
꿈이 있었다. 웰니스 치유 관광농원. 귀농·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이 와서 쉬고, 배우고, 치유받는 공간. 스마트팜과 6차산업을 기반으로 한 아쉬람.
1년에 3필지밖에 나눌 수 없는 법규 때문에 3년에 걸쳐 9필지로 나눴다. 수목을
가꾸고 도로를 넓혔다. 계곡을 품은 작은 수목원의 틀이 잡혀갔다.
박문호 지점장 소유 1,000평 농지에도 3년에 걸쳐
9개 주택 인허가를 냈다. 1채는 먼저 준공을 냈다.
태안 신두리 해수욕장에 6,800평, 괴산 KTX 연풍역
주변에 5,600평도 확보해뒀다.
물한계곡 8,000평과 이 부지들이 함께 시너지를 낼 것이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영혼의
쉼터. 그것이 내가 그리는 인생 2막이었다.
제64장. 바다와 노을
아이들이 자랐다.
바다는 시흥의 자동차 관련
회사에서 3년을 일하다 일본계 반도체 화학업체로 이직했다. 베트남
군인 집안 딸과 결혼을 준비한다고 했다. 추석에 가족 상견례를 위해 베트남에 가야 한다고.
노을은 일본 리츠메이칸에서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갔다가 거기서 의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인도계 영국인을 만났다. 5월 5일에 결혼한다고 했다.
5월에는 영국으로, 추석에는 베트남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해외여행
두 번이 예정됐다.
* * *
바다와 노을은 숙이의 열정적인
뒷받침으로 자기 자리를 잡았다.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숙이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바다에게 어린이집 원장 자격증을 딴 숙이가, 노을의
등하교를 위해 더부살이까지 했던 숙이가.
그 숙이가 없었으면 아이들이
이렇게 됐을 리 없었다.
나는 두 번 교도소에 갔다. 그 시간 동안 숙이는 두 번 더 강해졌다.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사람.
제65장. 일사천리
2025년 12월. '일사천리'라는 상호로 개인사업자 컨설팅 회사를 개업했다.
1993년 군산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하며 꿈꿨던 그 이름이었다. 모든
일이 물 흐르듯 순조롭게. 그 이름을 다시 꺼냈다.
이번에는 달랐다.
과거의 일사천리는 돈을 쫓았다. 이번의 일사천리는 사람을 쫓는다. 무너진 사람들의 삶을 복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폐업 신고, 세무 정리, 임대차 종료, 재고 처분, 부채
조정. 사업정리에서 재창업까지 이어지는 통합형 컨설팅.
책으로 배운 컨설턴트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언어로 조언하는 컨설턴트였다.
2026년 8월이면 파산·면책
후 만 5년이 지난다. 내 앞으로 금융을 일으킬 자격을 취득한다. 그때부터는 더 넓은 일을 할 수 있다.
제66장. 숙이의 집
2026년 2월 13일. 설 연휴를 앞두고 숙이와 엑슬루타워에 다시 입주했다.
58평이 아닌 48평형이었지만, 단지
내 최고의 뷰가 보이는 곳이었다. 임병태 회장이 살던, 고급스럽게
인테리어가 된 105동 3205호였다.
10년 만의 귀환.
숙이가 쓸고 닦았다. 한이 맺힌 사람처럼.
"예전에 우리 엄마가 화산 그 촌구석에서 새로 집을 지어서 들어갔을 때 마루를 쓸고 닦으면서 했던 말이
있어. 나도 이런 집에서 살아보는구나라고.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어."
가슴이 쓰라렸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창밖으로 금강이 보였다. 멀리 해 지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경부고속도로와 KTX 노선이 환히 보였다.
어떻게 해서든 1년 안에 숙이 소유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 * *
원광디지털대학교 웰니스치유관광학과에 1학년으로 입학했다.
내가 알아야 풀어갈 수 있으니. 무지와 능력이 안 돼 실패한 그간 사람들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되니까. 내가
모르는 분야를 배워야 한다.
기존과 단절된 새로운 인간관계도
만들어야 했다. 주광현을 리셋하고 화광동진으로, 재창조하고
자유를 향해 항해할 것이다.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감추고 세속의 티끌과 함께하는 삶.
그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겠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이제 그 선언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 제9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