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철학의 탄생
화광동진 · 그래도(Anyway)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배신도 상처도
아니었다. 그래도 걷겠다는 의지였다."
— 화광동진
제67장. 두 번 무너진 사람이 얻은 것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어떻게 두 번이나 무너지고도 다시 일어났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한참 생각하곤
한다. 대답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답이 너무 단순해서다.
무너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무너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 무너짐은 내게 법을
가르쳐줬다. 의리가 법 앞에서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법을 알면 의리를 지키는 방법도 생긴다는 것을.
두 번째 무너짐은 내게 사람을
가르쳐줬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칼이 날아온다는 것을. 그러나
그 칼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두 번의 교도소 생활은
내게 나를 가르쳐줬다. 외부의 소음이 사라지자, 나의 내면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 질문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대답이 나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
* * *
교도소 독방에서 나는 모든
종교의 경전을 읽었다.
성경, 불경, 티베트 밀교, 이슬람
경전, 노자와 장자. 그 모든 것이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가장 많이 배운다. 가장 낮아질
때 가장 깊어진다.
그리고 한 책을 만났다. 교도소 신문 광고 구석에서.
'나를 깨우는 명상.' 임연수 교장이 쓴 책이었다.
그 책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간단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훨씬 큰 존재라는 것. 내가 경험한 고통은 나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깊어지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 에고의 나를 내려놓을 때, 실체적인 내가 드러난다는
것.
그것이 철학이 됐다.
제68장. 화광동진(和光同塵)
화광동진.
노자 도덕경 56장에 나오는 말이다. 빛을 감추고 세속의 티끌과 함께한다.
처음 이 말을 만났을 때는
추상적으로만 들렸다. 빛을 감춘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티끌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런데 경원뷰건설 현장 컨설팅을
하던 때 그것이 몸으로 왔다.
나는 과거 수백억 프로젝트를
지휘하던 사람이었다. 그 빛을 현장에서 꺼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성공을 자랑하는 전과자를.
그래서 꺼내지 않았다. 그냥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현장소장 옆에서 공정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문제를 들었다. 그리고 아는 것을 말해줬다.
그것이 화광동진이었다.
빛은 내 안에 있었다. 꺼내지 않아도 됐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 * *
화광동진은 자기 비하가 아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필요한 곳에 맞게 쓰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나는 두 번 무너졌다. 그 두 번의 무너짐이 나를 가장 낮은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가장 낮은 곳에서, 나는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 사람은 무너진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나는 안다. 그 바닥의 냄새를, 그 차가운 온도를, 그 긴 밤의 길이를.
그래서 나는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나도 여기 있었다. 그래도 나왔다."
제69장. 그래도(Anyway)
두 번째 교도소에서 켄트 M. 키스의 '그래도(Anyway)'를
만났다.
하버드대와 옥스포드대를 졸업한
뒤 변호사, 공무원, CEO, 대학 총장을 지낸 그가 1968년 19세에 쓴 시였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인도 콜카타 어린이집 벽에 걸어두고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다는 그 열 개의 문장.
나는 그 열 개의 문장을 읽으며
숨이 막혔다.
내 인생이 거기 있었다.
* * *
사람들은 엉뚱하고 불합리하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라.
좋은 일을 하면 이기적인 속셈이 있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성공을 하면 거짓 친구와 진짜 적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래도 성공하라.
오늘 한 좋은 일이 내일 잊혀질 수 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정직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흠이 잡힐 수 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큰 생각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 작은 생각을 가진 소인배에 쓰러질 수 있다.
그래도 큰 생각을 품어라.
사람들은 약자를 동정하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당신이 오래 쌓아 올린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쌓아 올려라.
사람들이 도움을 원해 도와줬는데 오히려 비난받을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을 도우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주어도 되려 크게 실망할 수 있다.
그래도 최고의 것을 주어라.
* * *
나는 이 열 개의 문장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내가 의리를 지키다 무너졌을
때, 배신당하고 다시 무너졌을 때, 그래도 나는 계속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리석음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래도'였다.
켄트 M. 키스는 말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역설적인 인생을 살 때 비로소 당신은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당신이 변화시키는 삶 중 하나는
당신 자신의 삶이 될 것이다."
이 말이 내 인생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화광동진은 방법이었다. 그래도는 태도였다.
방법과 태도가 합쳐지자, 내가 가야 할 방향이 보였다.
제70장. 무너진 사람을 일으키는 사람
나는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는 분야가 있다. 무너지는 것과 다시 일어서는 것. 그
전 과정을 직접 통과한 사람이 내 주변에 없다.
창업의 기쁨을 알고, 위기의 공포를 알고, 폐업의 무너짐을 알고, 재기의 고통을 알고, 법률과 금융의 복잡함을 알고, 현장 실무의 냉혹함을 알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안다.
이것은 책으로 배운 지식이
아니다. 몸으로 겪은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그 경험을 써야
한다. 말해야 한다. 무너진 사람에게 건네야 한다.
* * *
사업을 정리하다 막힌 사람이
찾아온다. 빚이 있고, 임대차가 얽혀 있고, 재고가 쌓여 있고, 세금이 밀려 있는 사람.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한다.
"저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달라진다. 이론으로 조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창업을 꿈꾸지만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찾아온다. 신용불량, 전과 기록, 나이 오십. 그런 조건에서 어떻게 다시 시작하냐는 사람.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한다.
"저도 거기서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위로이자, 가장 실체적인 조언이다.
제71장. 행운유수(行雲流水)
행운유수(行雲流水).
흘러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른다는 뜻이다.
나는 오래 집착했다. 첫 번째 제국에 집착했다. 의리에 집착했다. 명예에 집착했다. 억울함에 집착했다.
그 집착들이 나를 두 번 더
무너지게 했다.
교도소에서 명상을 배우면서
알았다. 흘려보내는 것이 포기가 아니라는 것을. 구름은 하늘에
그 모양을 새기지 않는다. 물은 지나간 자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늘을 채우고 땅을 적신다.
나는 이제 흐르려 한다.
무너진 것에 집착하지 않고, 배신당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그냥 흐른다. 필요한 곳으로, 필요한
만큼.
* * *
두 번 무너지고 나서 얻은
가장 큰 것은 자유다.
잃을 것이 없어지면 두려울
것도 없다. 잃을 것이 없어지면 할 수 있는 말이 생긴다. 잃을
것이 없어지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보인다.
나는 이제 잃을 것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잃어도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안다. 그리고 절대 잃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
잃어도 되는 것: 돈, 명예, 지위, 사람들의 시선.
잃지 않아야 할 것: 숙이, 바다, 노을, 그리고 나의 철학.
그것이 두 번의 무너짐이 남긴
재산이다.
제72장. 사명 선언
나는 이 책을 쓰면서 한 가지
사명을 확인했다.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것.
두 번 무너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사람은 무너진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두 번 무너진 나는 그 마음을 안다.
그 앎이 내 자산이다.
* * *
나는 대한민국 소상공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실패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나는 두 번 실패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다.
폐업이 수치가 아니다. 나는 12년 회사를 문 닫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배신당했다고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두 번 칼을 맞았다. 그래도
사람을 믿는다.
그것이 '그래도'다.
배신당해도 그래도 사랑한다. 무너져도 그래도 걷는다. 잃어버려도 그래도 쌓는다.
Anyway.
그 한 단어가 내 철학의 전부다.
* * *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
당신이 지금 무너져 있다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책이다.
당신이 지금 배신당해 아프다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책이다.
당신이 지금 세상이 등을 돌렸다고
느낀다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책이다.
나는 그 길을 걸어봤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따라오면 된다.
그래도, 나는 사랑하리라.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이고, 이 책의 전부이고, 내 인생의 결론이다.
— 제10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