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첫 번째 실형
2008~2013년
"무너진 것이 나를 만든다."
— 화광동진
제36장. 사무장의 첫날
박정원 변호사 사무소 사무장. 2008년 10월, 그것이
나의 새 직함이었다.
사무소는 군산지원 바로 옆
건물에 있었다. 창문을 열면 법원 현판이 보였다. 내가 드나들던
그곳의 맞은편에 내 책상이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박정원 변호사는 본업인 법률
자문보다 채식 강연에 더 열심이었다. 세계 기후 위기와 동물 복지를 주제로 한 강연을 전국을 돌며 다녔다. 한 번 강연에 기본으로 3백만 원 가까운 비용을 자비로 썼다. 채식 도시락까지 준비해서 시식을 시켜주면서.
"사형! 마이너스 통장이 1억 5천만 원이 바닥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계속하면 됩니까?"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야."
그분의 그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다. 왜 이렇게도 절실하게 하면서 돈을 안 받는가. 나중에야
알았다. 그분에게 채식 강연은 사명이었다. 나에게 법률 실무를
가르치는 것도 사명이었다.
나는 그분을 따라다니며 운전을
했다. 강연장을 설치했다. 도시락을 날랐다. 그러면서 사이사이에 법률 서류를 배웠다. 채무조정, 경매, NPL. 책상 위가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는 법률이었다.
* * *
출소 후 3년이 지나자 주변에서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장 신축 컨설팅이었다. 익산 석암동 머플러 공장, 김제 백구 생과일 주스 공장, 세종시 철강 구조재 가공 공장. 부지 선정부터 인허가, 신용보증기금 시설자금보증, 금융 설계, 준공까지. 자본 없이 공장을 세우는 설계가 내 특기였다.
"주 사무장! 어떻게 이런 방법이 있습니까? 임대 공장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자가 공장을 꿈도 못 꿨는데."
"방법을 알면 됩니다."
방법을 아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 박문호 지점장이었다. 예전부터 인연이 있던 분이었다. 지점이 바뀌어도 연락이 됐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길을 열어줬다.
그렇게 돈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네 식구가 단칸방 복층 오피스텔에 옹기종기 살면서도 희망이 보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 한 채는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37장. 전신마비
그러던 어느 날 발끝에서 이상한
감각이 왔다.
처음에는 저린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것이 발끝에서 발목으로, 발목에서 종아리로,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올라왔다. 두 시간 만에 허리까지 올라왔다. 목까지 올라왔을 때 119를 불렀다.
가수원 종합병원 응급실.
병명은 갑상선 항진증이었다. 칼륨 수치가 비정상이어서 생기는 증상이었다. 그런데 당뇨까지 동시에
걸렸다.
의사가 말했다. 당을 떨어뜨리는 식단을 하면 칼륨 수치가 떨어지고, 칼륨 수치를
올리는 식단을 하면 당 수치가 올라간다고. 두 가지 상반된 증상이 동시에 벌어지니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한 번 실려가면 1주일을 입원해야 했다. 한 달 사이에 두 번 119에 실려갔다.
두 번째 실려가는 중에 음성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나뿐 아니라 자손까지 씨를 말리겠다는 저주였다. 셋째 형이었다.
숙이가 그 음성을 듣고 펑펑
울었다. 한 번도 도움을 준 적 없는 사람들이 사경을 헤매는 남편에게 저주를 퍼붓는다고.
나는 이불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너희의 저주에 죽을 수 없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숙이가 고생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쓰러질 수 없다.'
* * *
숙이가 매달렸다.
"채식 때문이야. 이제 고만하고 고기 좀 먹어. 고기 싫으면 생선이라도, 계란이라도, 우유라도."
"죽으면 죽었지 10년의 약속은 지킬 거야. 지금 포기하면 너무 아깝고 억울하지 않겠어."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숙이가 울었다. 나도 그 울음소리가 아팠다. 그러나 약속이었다. 내면에서 한 약속이었다.
당뇨 식단 베지밀A, 오이, 과일 두 조각. 그것으로
버텼다. 두 달 넘게 악으로 버티며 근처 등산로를 매일 올랐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그래도 올랐다. 피눈물이 났다. 이를 박박 갈며 체력을 올렸다.
천천히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제38장. 둘째 형
전주의 둘째 형이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갓 50대였다. 어릴 때 전주고를 다니다 폐병을 앓았던 후유증이 당뇨로
이어져 투석 중이었다.
첫 번째 징역 때 전주교도소로
접견을 오던 형이었다. 병든 몸으로 버스를 타고 와서 창살 너머로 말했다.
"차라리 나에게 대표이사를 맡겼으면 네가 이렇게 고생 안 해도 됐는데.
왜 광일이하고 같이 일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냐."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던 형이었다. 소득도 없는 사람이 형수에게 받은 푼돈 용돈을 모아 영치금으로 넣어주고 가곤 했다. 형이 살던 집 근처에 전주교도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형이 갔다.
등산로를 오르면서 형 생각을
했다. 울분이 끌어올랐다. 가난이 사람을 이렇게 일찍 데려간다는
것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쉬지 못한 생이었다. 나는 그 울분을 발로 밟으며 산을 올랐다.
제39장. 바다와 노을이 자라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은
자랐다.
바다는 성적이 우수했다. 기숙사가 있는 연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조용하고 묵묵한 아이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나를 닮았다고 숙이가 말했다.
노을은 달랐다. 어릴 때부터 무용에 소질이 있었다. 발레를 하더니 한국무용으로 넘어왔다.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선생님이 특출나다고 했다. 선화여중을
목표로 실기를 준비했다. 대기자 1번을 받았으나 아깝게 떨어졌다.
그때 박정원 변호사가 동강중학교를
소개해줬다. 로타리클럽 후원으로 외국에 1년간 교환학생을
보내는 특성화 중학교였다. 그분이 그 학교에서 채식 강연과 법률 강연을 해온 인연으로 교장과 안면이
있었다.
노을이 입학했다. 그리고 3학년 2학기, 미국 플로리다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형편은 안 좋았지만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것만큼은 땡빚을 얻어서라도 가르치려는 숙이의 의지였다. 타인이 보면 부잣집이라서 그런 코스를
다니는 것으로 알았으나, 돈 안 들이고 가르칠 수 있는 정보를 취합하는 숙이의 능력이었다.
그게 고마웠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든든하게 버텨주는 숙이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제40장. 아버지의 마지막 전화
2011년 가을이었다.
형들이 또 일을 저질렀다. 다섯째 형이 자유프라자 경매에 어머니 아버지 집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단독 입찰을 넣었다. 유치권이 있는 건물에 무모하게 뛰어든 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막둥이냐?"
"네, 아버지."
"니 형 도와줘라."
"아니요. 도와줄 수 없습니다. 저보고 또 징역 가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형을 도와주는데 무슨 징역을 가!"
"제가 형을 도와주는 순간 제가 징역 갑니다. 이번은 아버지
말씀이라도 따를 수 없습니다."
"아니, 니 애비 어미 길거리 나앉으라는 말이냐? 집 팔아서 경매 자금 줬는데."
"제가 집 팔아서 주라고 했습니까? 제가 첫 번째 징역 갔을
때도 형 대신해서 간 거잖아요. 그리고 5층 스포츠센터 줬으면
그걸로 만족해야지, 왜 남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얹느냐구요."
"어이구 알았다. 이놈아! 기어이
니 놈이 나를 두 번 죽이는구나! 뚝!"
전화가 끊겼다.
"으아아아! 왜 나를 이렇게도 괴롭히시냐구요."
그것이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 * *
다음 날 해질녘, 여기저기 형제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넷째 형 목사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버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얼른 김제 장례식장으로 내려가라.'
순간 멍해졌다.
집을 팔아 떠난 후에도 아버지는
그 집 옆 감나무 아래에서 흙을 정리하다가, 후진하는 트럭에 깔리셨다.
뒷바퀴가 머리와 가슴을 밟고 넘어갔다. 현장에서 즉사하셨다.
소식을 듣고 종수가 차로 태우러
왔다. 시골집에 도착하니 사고를 낸 운전기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장례식장으로 갔다. 형제들이 나뉘어 있었다. 조문객은 대부분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현기증이 몰려왔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유언이
되어버렸다. '기어이 니 놈이 나를 두 번 죽이는구나.'
그저 슬픔에 젖어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사치였다.
'솥 따~요~ 에~ 솥 따요.'
구성진 그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셨다.
제41장. 터치 바이 터치의 주인공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전화기를
다시 켰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중에
낯선 번호가 계속 들어와 있었다. 한 시간마다, 나중에는 30분마다.
숙이가 말했다.
"이준혁이라는 친구. 당신 친구라고 하던데, 한 시간마다 전화 오더니 나중에는 30분마다 와. 무척 다급해 보이던데."
"아, 이준혁."
중학교 때 수학여행비 노가다를
갔다가 이층에서 눈을 비비며 내려오던 그 집의 아들. 그 후로 서로 눈치보며 피해 다녔던 친구.
철강 컨설팅 현장에서 우연히
재회한 지 얼마 안 된 터였다.
전화를 걸었다.
"친구야! 정신 차렸냐?"
"뭐야, 내가 미쳤냐?"
"야, 너 장례식장에서 얼이 빠져 있었어. 내가 무슨 말 했는지 기억해?"
"아니."
"거봐. 무조건 만나야 해.
내려간다."
두 시간 뒤 와동 아파트 뒤
중화요리집에서 이준혁이 나타났다.
"형 성호 형이 P철강 본사 글로벌팀장으로 배정됐어. 현대중공업 담당이야. 철자재를 안정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 라인을
뚫어주겠다는데, 직접 사업을 하고 싶어. 실적 있는 법인
인수해서 자금 만들어 줄 수 있어?"
"신용불량이면 대표자로 못 올라가잖아."
"그건 괜찮아. 담보 여력 있는 부동산 가져오면 P철강 포스코피엔에스 구매코드 열어준다는 거야. 4개월 여신으로."
"NPL이나 반값 물건 알아볼게."
이준혁은 집요했다. 노을 귀국 때는 공항에 현수막까지 걸고 꽃다발로 환영 행사까지 해줬다.
내 자식에게 잘해주는데 나쁘게
볼 사람이 없었다. 그게 악연의 시작이었다.
제42장. P철강의 함정
일은 이상하게 흘렀다.
P철강 구매코드 문제는 이준혁 형 성호의 일처리가 느렸다. 코드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P철강 이름을 달고 각처에서
자재 납품 요청이 들어왔다.
동시에 NPL 물건 하나가 잡혔다. 익산 어양동 장승사우나. 시중가의 절반 이하로 인수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P철강 관련 사업의 담보로 제공했다. 자재가 납품됐다. 대금이 들어올 것이었다.
그런데 대금이 안 들어왔다.
성호 형은 이미 P철강에서 퇴출되어 있었다. 이준석이라는 인물이 성호 형의 자리를
이미 차지하고 있었고, 대질신문에서 진술이 엇갈렸다.
P철강의 법무 고문은 T 법무법인이었다. 그쪽에서 군산검찰청에 고소장이 접수됐다. 마치 판결문처럼 정교하게
작성된 고소장이었다.
기획 수사의 냄새가 났다. 군산에서 나름 토착 세력이라는 인물들이 동원된 몰아가기 수사였다.
나는 검찰청 수사과에서 말했다.
"고도로 진화한 사기꾼이라고 하셨습니까? 전과자가 어떻게 변호사
사무장 직함을 쓰냐고요? 그럼 당신은 고스톱 쳐서 수사관 됐어요? 지금
하신 말 전부 조서에 남겨주세요. 그러면 그 말 그대로 답변해 줄게요."
"이 새끼봐라. 당장 구속영장 쳐."
"그래 구속영장 쳐봐라. 나도 이런 조폭 같은 수사관에게는
조사받기 싫으니까."
버텼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 * *
박정원 변호사를 찾아갔다.
"주사형! 왜 또 쓰레기를 가져오는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멈추라고 했잖아."
"그러면 어쩌라는 겁니까?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데요."
"왜 자꾸 쓰레기들을 가져오냐는 말이야. 애당초 능력이 안
되는 놈들에게 맡긴 것부터가 니가 뿌린 씨앗이잖아. 너의 내면을 봐라."
나는 얼어붙었다. 맞는 말이었다. 알면서도 방치한 것이었다.
제43장. 재건의 그림자
2011년 3월, 와동 아파트에
입주했다.
컨설팅 비용으로 대출을 안고
들어간 집이었다.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처음 생겼다. 숙이가
창문을 열었다. 한참 바깥을 바라봤다.
"이제 됐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 집에서 노을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공항에 이준혁이 현수막을 들고 나타났다. 바다와
노을이 웃었다. 숙이도 웃었다.
그 웃음이 오래 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P철강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T 법무법인의 고소장이
접수되고, 기획 수사가 진행되면서 나는 점점 그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갔다.
재건이 시작되는 듯했던 그
시점에, 두 번째 무너짐이 준비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아니,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멈추는 것은 배신이었다. 그 생각이 나를 또 한 번 낭떠러지로 이끌었다.
— 제6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