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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군대와 창업 1989~1993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많이 배웠다." — 화광동진

자서전 · · 약 18분 · 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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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광동진(和光同塵) 프로젝트

3

군대와 창업

1989~1993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많이 배웠다."

화광동진


 

15. 18경비대

후배 학생회장이 학교에 잘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운전면허학원에 다녔다.

은사 선생님이 노가다로 모은 돈으로 학원비를 내주셨다. 한 달 만에 1종보통 면허를 땄다. 기술병과로 자원 입대를 신청했다.

논산훈련소. 그 지독한 화생방 훈련과 유격훈련, 야간행군 끝에 자대 배치를 위한 야간 기차를 탔다. 서쪽 끝에서 태어났는데, 자대 배치를 받은 곳은 동쪽 끝이었다. 안동, 영주, 봉화, 청송을 담당하는 50사단 30연대. 18경비대.

'어그메. 뭔 인생이 이렇게 꼬이나.'

고향에 오려면 청량리까지 기차를 타고 올라갔다가 다시 호남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오는 데만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왜 하필 18경비대란 말인가.

현역병 6명에 단기 하사관 8명이 한 막사를 쓰고, 방위병이 300명이 넘는 부대였다. 방위는 현역병을 깔아 뭉개려 하고, 하사관은 현역병을 잡아먹으려 하고, 현역병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구조. 이런 개막장 드라마가 또 있을까.

운전병과였는데 본부 정보통신과에 배치를 받았다. 연대와 사단 간 통신 음어를 해독할 사람이 없다고, 똑똑해 보인다는 이유로 전역할 병장의 후임으로 앉혀진 것이었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하사관과 한 내무반을 썼는데 서로 대우해주지 말고 갈굼하라는 교육을 위에서 아래로 시키는 구조였다. 단기 하사를 대우해주지 않으면 밤새 얼차려였다. 방위병들도 현역에게 대우하지 말라고 서로 교육을 시켰다. 부대에서는 현역이 방위를 잡아들이고, 현역이 외박이나 휴가를 나가면 시내에서 방위병들에게 보복을 당하는 악순환.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얼차려를 받고 선임들의 장난감이 되어 정신없이 시간이 갔다. 군에 오게 된 과정에 대한 상실감과 외로움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가끔 외박 일정이 잡혀도 군 월급 몇 푼으로는 여관도 잡을 수 없었고, 고향까지 왔다 가는 데 시간을 다 잡아먹어 의미가 없었다.

* * *

그나마 위로가 된 사람이 있었다.

통신병과에 새로 온 방위 사병 중 동갑인 강세민이었다. 나름 지역사회에서 잘 나가는 정보통신 기술자였고, 군대 사회를 떠나 친구가 됐다. 그 친구 덕에 외출이든 외박이든 보호를 받고 대접을 받았다.

강세민은 말했다.

"화병장, 이 부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방위 쪽이든 하사관 쪽이든 어느 한 편에 서야 합니다. 어중간하게 있으면 양쪽 다 적이 됩니다."

"나는 어느 편도 안 선다. 내가 편이 되어줄 테니 나를 따르면 된다."

말이 되는 소리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 말이 현실이 됐다. 어떻게 됐는지는, 소백산 죽령고개가 말해줄 것이다.


 

16. 소백산 45킬로미터

진지구축 훈련 명령이 떨어졌다.

소백산 죽령고개에 통신선을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대대본부 소속으로 작전계획을 잡고 각 중대 통신병들을 소집해 작전지도에 표시된 진지별로 통신선로를 깔았다. 그런데 땅속 30센티 이상 깊이로 매설해야 한다고 했다. 서 있기도 힘든 경사도의 산속에서 통신선을 파묻으라는 것이었다. 계곡은 또 어떻게 건너고. 막노동도 이런 막노동이 없었다. 주어진 시간도 촉박했다.

강압적 통제로는 도저히 결과를 낼 수 없었다. 각 중대 선임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돌아온 요구는 단순했다. 자유를 달라. 막걸리를 허용해 달라. 체력보충이 필요하다.

선택해야 했다. 규정을 지키고 목표 달성을 못 하느냐, 규정을 어기고 결과를 만드느냐.

". 처벌을 받더라도 내가 책임진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목표치 성과를 내. 대신 다치지만 마라. 그러면 모든 거 다 용납할게."

"그 말 책임져야 합니다."

다음 날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썩어빠진 군 장비 대신 지역 건설현장에서 쓰는 전동드릴, 크레인, 포클레인이 동원됐다. 삶은 돼지고기에 막걸리까지 들어왔다. 나와 강세민은 부대 간부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무전으로 실시간 전달했다. 사전에 숨길 건 숨길 수 있도록. 술에 취해 표가 나는 사병은 산속 진지에 들어가 술이 깰 때까지 오침하고 나오라고 했다.

낙상사고나 작업 중 다치는 것은 보고도 않고 알아서 민간 병원에서 해결했다.

그렇게 장장 45킬로미터의 매설 선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통신병과 전원에게 34일 특별휴가가 주어졌다. 돌아가며 34일 동안 방위 측에서 접대를 받았다. 그렇게 서로 간의 신뢰를 쌓았다.

* * *

그런데 집단 휴가가 다른 병과의 시샘이 됐다. 방위병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하사관과 현역병의 갈굼이 더 심해졌다. 부대 안에서 오히려 통신병과 23명이 경계의 대상이 됐다. 왕따가 되어갔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보급품을 수령하러 연대 통신과에 방문했을 때 작전과장이 애로사항을 물었다. 상황을 이야기했다. 통신 집체교육과 연대 부대별 평가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선례를 만들면 사단 부대 표창을 받을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겠다고 건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대 공문이 왔다. 통신 집체교육 훈련 일정과 부대 평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 달 동안 통신병과만의 시간을 벌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용하는 교범 중 수기교육 교범을 뽑아 먼저 교육에 적용했다. 그리고 연대 통신과에 로비를 넣었다. 육사 교범을 이번 평가 기준으로 잡아달라고. 연대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육사 교범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선행 교육을 한 우리가 유리하다. 이제 틀과 각만 잡으면 된다.'

작전장교를 찾아가 약속을 받았다.

"이번 연대 평가에서 수상하면 조직 개편을 해 주십시오."

"정말 수상할 수 있겠나?"

"1등은 몰라도 3등 안에는 무조건 들어가게 만들겠습니다."

"못하면?"

"제가 기망한 것이니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허허. 자네는 장교로 임용되어야 할 사람인데. 왜 사관학교 진학하지 않았나?"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17. 야전삽의 밤

그주 일요일 내무반 분위기가 싸했다.

작전장교와 나눈 대화가 간부 회의에서 논의됐던 모양이었다. 그 내용이 하사관 선임에게 흘러들어갔다. 하사관 선임이 현역 선임 마병장을 불렀다.

"내무반에서 현역병 선임에게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건너뛰는 건방진 새끼가 있는데. 위계질서도 없는 현역병들은 말세야."

"어떤 새끼가 사고쳤어?"

"상병 화광동진!"

무차별 구타가 벌어졌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야간 취침 점호 때 하사관 선임이 또 비아냥댔다. 마병장은 별명이 마귀였다.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전원 연병장 집합이 떨어졌다. 너무 맞아서 연병장에 나갈 수 없었다. 밖에서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구타 소리가 들렸다. 내무반 안에서 하사관들이 낄낄거리며 조롱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관물대에 정리된 야전삽을 들었다. 그리고 하사관들에게 무차별로 휘둘렀다. 하사관들은 팬티 바람으로 내무반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사관 선임을 쫓아 병영 안을 달렸다.

야간 경계를 하던 방위병들이 어리둥절하며 당직사관에게 급히 보고했다. 쫓기던 하사관 선임은 경계 사병에게 "저 새끼 안 잡고 뭐해" 소리를 질렀다. "내 앞 막는 놈 다 죽어!" 외치며 선임 하사관만 쫓았다.

그렇게 한참 쫓다가 멈춘 곳. 공중전화 앞이었다.

왠지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호주머니에 동전도 없었다. 수신자 부담 130. 둘째 형 번호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흑흑흑."

"동진이니? 동진이 맞지? 너 거기 가만히 있어. 그냥 거기 가만히 있어. 아무 생각하지 말고."

"혀엉..."

얼마 지나지 않아 1호차가 왔다. 대대장이 아니라 작전장교가 타고 있었다.

"자식, 갈 데가 없지? 괜찮아. 괜찮아."

"작전장교님. 제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건가요. 이렇게 죽도록 맞을 만큼."

다음 날 아침, 전 병력 완전무장으로 연병장에 모였다. 나는 열외였다. 대대장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부터 죽령고개 정상까지 행군한다. 통신병과는 열외. 연대 부대평가 집체교육 훈련에 집중한다. 통신병과는 입상하지 못하면 지금의 두 배로 행군한다. 그리고 화광동진 상병은 집체교육 마치고 대대장 관사에서 숙식하며 1호차를 운전한다."

말이 운전병이지, 보호였다. 그리고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대대장 아들 과외를 맡게 된 것이었다.

* * *

어느 날 아들이 말을 듣지 않고 명령을 했다. 아빠가 대대장이니 자기 말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도저히 가르칠 수 없었다. 문을 잠갔다. 그리고 몇 대 쥐어박았다. 아이가 큰소리로 울었다.

"화상병! 뭔 일인데 얘를 울려요!"

문을 못 열게 잠근 채 말했다.

"임마, 니 아버지가 내 상관이지, 니가 내 상관이야! 난 너의 가정교사야."

대대장님이 나오셨다.

"화상병! 동작 그만! 완전군장하고 연병장 50바퀴 돈다. 실시!"

차라리 연병장 도는 게 더 편했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몸으로 때우는 게 나았다.

"솥따요! 에에 솥따요!"

구보 가락에 맞춰 울부짖었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모든 게 싫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대대장님이 구보 군장으로 나와서 옆에서 같이 뛰셨다.

"야간에 구보는 몸에 좋아. 체력단련 한다고 생각하고."

"."

'지금 몸이 만신창이인데 무슨 몸에 좋아.'

"아기가 오냐오냐 키웠더니 버릇이 없어. 잘했다. 내 대신 버릇 잡아줘서. 하하하. 그놈 요물일세."


 

18. 연대 1등과 영창 30

연대 집체교육 평가. 이변은 없었다.

2주 먼저 시작한 교육을 반복 실습으로 연습했으니 평가 때 의장대처럼 칼각이 나왔다. 시범단의 눈이 투기로 일렁였다. 죽령고개 행군을 안 하기 위해, 중대 편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통신병과 23명이 뭉쳤다. 결과는 압도적 만장일치 1위였다.

연대 부대 표창을 받았다. 사단에 시범단으로 가서 공연을 했다. 연대가 시범사례로 채택돼 사단 표창도 받았다. 약속대로 조직 개편에서 통신병과만 중대본부로 편제됐다. 67일 포상 휴가도 주어졌다.

중대 소속이면서도 대대본부 직접 통제를 받으니 각 중대에서도 통신병과는 건들지 않았다. 하사관과 현역병들도 노터치였다.

그 후 음어 대회에서도 입상했다. 통신병과는 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통신병과에 차출되려고 줄 서고 사전에 작업이 들어왔다.

그렇게 병장을 달았다. 현역병 서열 3위가 됐다. 그런데 선임 둘이 다 한 달 차이 선임이라 일은 안 하고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하게 했다. 일만 늘었다.

'시발, 지들은 다 열외고 나만 일시켜. 에이구 내 팔자야.'

* * *

그런데 마지막 고비가 터졌다.

방위병 신입이 위병소를 통과하고 있었다. 방위 상병 선임들이 90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군부대 안에서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민아, 저게 뭐야?"

"소백산 쪽 나이트 기도입니다. 지역에서 잘나가는 행동대장."

"군발이를 향해 특히 하사관들한테 막 대하는 스타일이라서요. 건들지 마세요. 인생 피곤해져요."

외박 날짜에 맞춰 그를 만났다. 오철중이었다. 삼겹살에 소주를 먹으며 말을 꺼냈다.

"형님, 부대에서는 좀 자중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그냥 술이나 처먹어. 술맛 떨어지게 군대 이야기 하지 말고."

"형님 이미지 상할까봐 그럽니다. 군대가 개판이 되고 있어요. 타부대까지 소문이 돌면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야 임마. 신경 끄고 술이나 쳐먹으라고."

그날 싸움이 붙었다. 맞기는 내가 정신없이 맞았다. 엉겁결에 나간 뒤돌려차기 한 방. 오철중 형이 쓰러졌다. 못 일어났다. 갈비뼈가 부러져 4주를 누워 있어야 할 형편이었다.

"상희형, 미안하다. 엄살 아닌데 숨을 쉴 수가 없다."

"세민아, 병원 데려가자."

조용히 끝날 일이 커졌다. 인사계 일등상사가 합의서를 받아오라 했다. 둘째 형에게 SOS를 쳤다. 형은 전주에서 영주까지 와서 치료비와 보약값을 놓고 가셨다. 그런데 얼굴을 안 보고 가셨다. 나중에 들으니 얼굴 보면 두들겨 팰 것 같아서 못 왔다고 하셨다.

그 합의서가 문제가 됐다. 전역 두 달을 남겨놓고 사단 인사 검열에서 합의서가 나왔다. 군내 구타로 걸려 헌병대에 끌려갔다. 안동 연대에서 15, 대구 사단에서 15. 영창 총 30일을 살았다.

재판을 받으러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가기 전날, 기적이 일어났다.

대대장님이 1호차를 타고 오셨다. 그동안 내가 만들어낸 성과를 바탕으로 사단장을 설득했다고 하셨다.

마지막 혹한기 훈련. 대대 지휘본부에서 토끼를 몰이해 잡아와 요리해 소주잔을 돌렸다.

"수고 했다. 규정상 영창 살은 날짜만큼 더 복무해야 하는데. 한 달 휴가 줄 테니 전역하는 날에 와서 전역신고만 하고 가라. 니 덕에 군 생활 즐거웠다. 니 덕에 아들 성격도 좋아지고 성적도 올랐고, 니 덕에 승급 실적 올라가 대령 달 것 같다. 고맙다."

그렇게 군대가 끝났다.


 

19. 전주, 그리고 처음 만난 사람

말년 위로 휴가 기간, 전주에 있는 둘째 형 광고기획사에서 일을 배웠다.

오철중 형 치료비와 합의금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낮에는 전주 구석구석 발품을 팔아 명함을 돌렸다. 저녁에는 형에게 실크스크린과 나염 기술을 배웠다. 불법 복제 테이프 팔던 시절, 낮에는 도서관에서 전단지 돌리고 밤에 테이프 복제하던 습관이 그대로였다.

형 회사는 판촉물이 주 영업 품목이었다. 그런데 매출 단가가 너무 낮고 개업집만 상대하는 구조여서 발전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형에게 제안했다. 덤핑 물건을 잡아서 보험회사에 납품하는 고정 거래처를 뚫자고.

그렇게 보험회사 영업을 시작했다. 고정 거래처가 하나씩 늘어갔다.

그 와중에 사내 커플이 생겼다. 숙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달랐다. 말이 많지 않았고, 웃을 때 눈이 먼저 웃었다. 회사 일을 누구보다 꼼꼼하게 했다. 나는 그 사람 옆에 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됐다. 형수가 못마땅해했다. 직원과 연애를 한다고. 숙이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형제지간 의가 상하겠다 싶어 독립을 결정했다.

하지만 숙이와의 연이 끊기지는 않았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보고 싶었다.

연애하던 그 시절에 혼자 썼던 글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 그리움, 외로움, 허전함.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 지어진 영혼의 단어 하나만으로도 고통은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 그렇다. 사랑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린 행복하다.

어린 나이에 불장난이라고 주변에서 말렸다. 숙이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말릴수록 더 애달팠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20. 일광상사 창업

그때 부천에서 공장을 다니던 여섯째 형에게 연락이 왔다.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리는 산재 사고가 났다는 것이었다. 더 방치하면 손까지 잘릴 수 있다고 했다. 달려갔다. 형의 손을 보는 순간 마음이 굳어졌다.

", 내가 영업할 테니 광고사 차리자."

여섯째 형 이름은 광일이었다. 광일을 거꾸로 뒤집으면 일광이 됐다. 날마다 빛나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군산에 광고사 일광상사를 설립했다. 전주 둘째 형 밑에서 독립해 군산에서 여섯째 형과 시작한 사업이었다.

* * *

군산. 1993.

아는 것이라고는 발품 파는 영업과, 형에게 배운 실크스크린과 나염 기술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당시 군산에서 명함 1갑의 소비자 가격은 1 5천 원이었다. 일광상사는 3갑에 1 5천 원으로 영업해도 50퍼센트 마진이 나왔다. 직접 생산하고, 찾아다니며 영업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군산은 가게를 차려놓고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구조였다. 우리는 달랐다. 찾아갔다.

매출이 빠르게 올라갔다.

같은 업종의 인쇄소와 판촉물 기획사들이 찾아와 텃세를 부렸다. 그들에게 상생을 제안했다. 직접 영업은 하지 않겠다. 대신 발주를 우리에게 해달라. 우리가 제작해서 납품해 주겠다고. 처음에는 코방귀도 안 뀌던 업체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그렇게 기반을 다져갔다.

기회도 찾아왔다. 캐리부룩 상품권이 덤핑으로 나왔다. 50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사서 60퍼센트에 보험회사에 납품했다. 마진이 났다. 그러다 캐리부룩이 부도나기 3개월 전 85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물건이 쏟아졌다. 30퍼센트에 팔면서 큰돈이 들어왔다.

그런데 욕심이 문제였다. 이제 그만하자고, 왠지 불안하다고 했다. 둘째 형이 95퍼센트 할인 물건을 또 잡았다.

", 원자재 가격이라도 나와야 살아남는데, 원자재 가격 이하로 떨어지면 종이쪼가리가 됩니다. 부도 납니다."

아니나 다를까. 반을 팔아 원금은 건졌는데 나머지 반이 휴지조각이 됐다. 도루묵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업은 계속됐다. 숙이와의 연도 이어졌다. 스물세 살의 사장이 군산 바닥에서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이름처럼 날마다 빛나고 싶었다.

일광상사. 그것이 시작이었다.

 

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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