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반격의 시작
1983~1989년
"두려움은 뛰어드는 순간 사라진다. 망설임 속에서만 커진다."
— 화광동진
제9장. 물로 배를 채우던 날들
중학교는 달랐다.
김제북중학교에 입학할 때 나는
이미 공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학교 못 가게 할까 봐 시작한 공부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공부 자체가 내 무기가 됐다. 국민학교 때 못
가진 것들을 중학교에서 되찾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또 달랐다.
점심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다들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는데 나만 빈손이었다. 돈도 없었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꺼내는 시간이 되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운동장으로
나가 온힘껏 달렸다. 헐떡이는 상태로 수돗가에 가서 물을 마셨다. 배가
출렁거릴 때까지 마셨다. 그렇게 점심을 때웠다.
달리면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아니, 달리고 나면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의 기술이었다.
학교 초기라 다들 어색한 사이였다. 아이들은 내가 도시락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 알아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게 차라리 나았다.
* * *
참고서를 살 돈이 없었다.
어느 날 쓰레기장 옆을 지나다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성문종합영어였다. 누군가 버린
것이었다. 표지가 해지고 안이 노랗게 변색됐지만, 내용은
온전했다. 집어 들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 한 권을 죽어라 외웠다. 발음은 제대로 못 했다.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냥 눈으로 보고 외우는 것.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외우고, 페이지를 외웠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학년이 다 갔다. 영어만 빼고 나머지는 1등이었다. 영어에서 깎인 점수를 채우지 못해 전체 2등이었다. 그러나 2학년이
되어 마지막 시험에서 처음으로 전교 1등을 했다. 영어가
따라왔다.
버린 책 한 권이 그것을 만들었다.
* * *
처음 탄 장학금으로 암돼지
새끼를 분양받아 키웠다.
밥 주고 돼지똥 치우는 막사
청소는 오로지 내 몫이었다. 토끼는 수를 줄이고 팔아서 달걀을 낳는 암닭 몇 마리를 샀다. 토요일에는 토끼 먹이를 위해 깔베기를 했다. 일요일에는 건축설비
하는 아저씨들 현장을 따라다니며 알바를 했다. 내가 쓸 돈은 내가 벌었다.
학교에서는 전교 1등이었다. 집에서는 돼지 먹이를 끓이는 아이였다. 두 세계가 공존했다.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 삶이었다.
제10장. 아버지와 계곡
2학년에서 학급 실장에 뽑혔고, 하반기에 연대장이 됐다.
연대장을 하며 학교 소풍과
수학여행을 주관하게 됐다. 소풍 코스를 전남 백양사에서 전북 내장산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잡았는데, 사전 답사를 해야 했다. 아버지께서 함께 가주시겠다고 하셨다.
김제역에서 백양사역까지 무궁화호를
타고 가서, 백양사를 보고 내장산으로 넘어가는 산길을 걸었다. 산속
계곡에 이르렀을 때 지친 나를 보고 아버지가 쉬어가자 하시며 팬티바람으로 계곡에 들어가셨다.
"어여 막둥이도 들어와. 아이 시원하다. 뭐하고 있누, 안 들어오고."
"아부지, 저는 빤스도 안 입었어요. 옷 입고 들어갈 수 없잖아요."
"애끼 이놈아. 그냥 홀라당 벗고 들어와."
"그래도 누가 보면 어떡해요. 저는 그냥 얼굴만 씻고 발만
담글게요."
"이 산속 깊은 곳에 누가 온다고. 그냥 홀라당 벗고 들어와. 근데 막둥이 빤스 없니?"
"형들 다 외지에 나가 있는데 집에 빤스가 어디 있남유."
아버지는 물을 털지도 않고
주섬주섬 옷을 입으시고 내게로 오셨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훌륭한 사람 되야혀. 막둥이가 아빠는 자랑스럽단다."
산속 계곡에서, 빤스도 없는 막내아들에게 아버지가 건넨 말이었다.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짧고 단순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지금도 귀에 남아 있다.
산을 내려와 내장사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풍은 많은 인원이 넘어갈 수 없으니 백양사 한 곳에서 마치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버지와 단 둘이 걸은 그 산길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가장
긴 하루였다.
제11장. 수학여행비의 노가다
수학여행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수학여행 가지 말고
그 시간에 같이 일을 하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돈이 어디 있다고 수학여행을 가냐고 하셨다.
"제가 연대장으로 행사를 주관하는데 어떻게 제가 빠집니까. 제가
알아서 수학여행비 만들어서 갈 테니 말리지만 말아주세요."
일요일에 시내 이층집 보일러
교체하는 노가다 현장에 시다로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드릴로 벽체를 뚫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일하고 있는데, 2층에서 음악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계단을 내려오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나는 일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학교에서 내 가방을 들어주던
친구였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던 그 녀석이, 이
집의 주인아들이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자존심이
확 상했다. 그런데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수학여행비를 납부해야
하는 현실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친구도 어색했는지 모르는 척하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날 일을 마치고 저녁때 현장
아저씨가 포장마차로 끌고 갔다.
"너 아까 왜 멍하니 서 있었냐?"
"그냥 멍해졌어요. 시발, 쪽팔려
죽겠네요."
"왜?"
"친구인데 저 가방모찌라구요. 저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방구
끼는 놈인데. 학교에 소문나면 어떡하냐구요."
"얼라, 이놈 보소. 어른
앞에서 시팔이 뭐냐!"
"아저씨에게 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냥 제 신세가 딱해서 이
현실에 하는 거잖아요."
"옛다. 막걸리나 한 잔 하고 잊어."
"저 학생이라고요."
"이놈아. 그러니까 한 잔 하고 집에 가서 다 잊고 자. 알딸딸하니 잠 잘 올 거다. 킬킬킬."
"에라, 모르겠다. 후르륵."
다음 날부터 학교에서 그 친구는
나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가 잊히지 않는다. 터치
바이 터치였던가.
그렇게 수학여행비를 마련했다. 연대장으로 수학여행을 주관했다. 아무도 몰랐다.
제12장. 직선제 학생회장
덕암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제북중학교와 같은 덕암학원
재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에서 그대로 올라온 학생들이 주류를 형성했다. 남학생 7개 반, 여학생 2개 반의 기형적인 구조에 성적순으로 문과·이과 특수반을 나눈 학교였다.
더 이상한 것이 있었다. 학생회장이 복학생이었다.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가 서너 살 많은 형이었다. 지역 불량써클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돌았고, 학원 재단 이사장과 카르텔을
이루는 구도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공부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1학년, 2학년 학급 실장을 했다. 지도부
차장도 맡았다. 문학서클 '디딤돌'에서 편집을 담당했다. 꾸준히 성적을 유지하며 대학을 준비해 나갔다.
* * *
1987년이었다.
민주화 열풍이 전국을 휩쓸었다. 학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교조에 포함된 교사들이 생겨났고, 기존 카르텔에 의해 지정되던 학생회장 선출에도 직선제 바람이 불었다.
3파전이었다. 학교에서 내세운 불량써클 출신 복학생 선배, 봉사활동 클럽 친구, 그리고 문학클럽의 나. 재학생들이 움직였다. 학교에서 내세운 사람은 안 된다며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다. 봉사클럽 친구가 나에게 양보했다.
복학생 선배와 일대일 경선이
됐다. 나이도 많고, 뒤에 조직이 있고, 학교의 지원을 받는 상대였다. 나에게는 아이들의 뜻이 있었다.
당선됐다.
덕암고등학교 4회 초대 직선제 학생회장.
* * *
당선되자마자 가슴속에 잠재됐던
것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관리하던 학생회비를
찾아왔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육성회비의 투명한 공개를 요구했다. 학원
이사장이 나를 불렀다. 사무실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이사장의 손이 날아왔다. 뺨을 맞았다.
학원 밖의 불량 조직이 개입하며
압력이 들어왔다. 그래도 덕암축제의 부활이라는 선거 공약을 지키기로 했다. 축제를 강행했다. 행사를 마치는 막바지에 뒤풀이도 못 하고 지도부
선생님의 오토바이 뒤에 타서 지역 불량써클의 난동을 피해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리더십이었다.
책임지는 자리가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제13장. 불합리에 맞서다
중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지역 폭력조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전교 1등에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나를 가입시키라는 윗선의
명령이 있었다고 했다. 김제의 공원에서 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와 둘러쌌다.
"가입 안 하면 죽이겠다. 어렵게 사는 거 아는데, 차라리 건달이 이 지역에서 네 인생에 도움이 될 거야."
나는 거절했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해결 못 하는 내가 어울려 다닐 여유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나와 친분 있는 친구를 내 대신 야구방망이로 죽도록 팼다. 그 친구는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그래, 시팔. 이판사판이다. 내가 여섯 명을 상대하면 죽겠지. 그런데 꼭 나를 죽여야 할 거야. 아니면 너희 얼굴 내가 다 아니까 한 명 한 명 찾아갈 거야."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갖은 욕과 협박을 다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물러났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입하면 아버지를
상대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아버지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으니 차라리 저들을 상대하는 게 낫다고. 어린 나이에 그것이 진심이었다.
* * *
고등학교 때도 비슷한 압력이
있었다.
덕암축제를 강행한 이후 학원
밖에서 더 강한 압력이 들어왔다. 이사장이 조직에 의뢰해 나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후배 학생회장이 폭력 교사 물러가라는 시위를 주도하다 쫓기고 있다는 연락도 왔다.
나는 그 후배를 위해 움직였다.
교원노조 선생님, 후배 학생회장, 그리고 중학교 때 나 대신 야구방망이로 맞았던 친구. 넷이 진안 운일암반일암 계곡에서 만났다.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상황을 들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를 때 갑자기
그 노랫가락이 떠올랐다.
"솥~따요. 에~ 솥따요."
그리고 통곡하면서 그 구슬픈
가락을 토해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동진아, 너 갑자기 왜 그러냐, 실성했냐!"
"그럼 이사장이라는 놈이 조폭에 의뢰해 어린놈 퇴학시키려고 명분 찾는 이 세상에 실성 안 할 놈이 있겠어요?"
그날 나는 두 가지를 부탁했다. 선생님에게는 폭력 교사 구호를 거기서 멈춰달라고 했다. 어른들 세력
싸움에 어린 새싹의 인생을 망칠 수 없으니. 조직 친구에게는 후배의 수배를 풀어달라고 했다. 대신 내가 자원 입대한다고, 다시는 김제에 발을 붙이지 않는다고
보고해달라고.
얼마 후 후배가 학교에 잘
다닌다는 소식이 왔다.
제14장. 첫 번째 사업과 대학의 꿈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사업이라는
것을 해봤다.
서울에서 시사영어사에 다니는
큰형에게 원본 테이프를 받아 복제해서 전국 국립대학교 도서관을 돌며 팔았다. 둘째 형과 함께였다. 정품보다 10분의 1 가격에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대학생을 상대로 한 영업이었다. 잉글리시얼라이브,
미시건액션잉글리시.
처음에는 복제한 제품을 사다가
배달했는데, 한 번에 6개씩 복제하는 기계를 가져왔다. 매주 일요일 새벽 열차를 타고 전국 국립대를 순회했다. 영업은 잘
됐다. 직접 복제하니 마진율이 원가 대비 100퍼센트였다. 경비를 빼도 순수 마진이 60퍼센트를 넘었다.
이 영업으로 전주권 학교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부산대학교에 배달 갔던 둘째
형이 시사영어사 본사 직원에게 덜미를 잡혔다. 물건도 빼앗기고 배상까지 했다. 사업이 한순간에 끝났다.
둘째 형이 말했다.
"막둥아. 목숨 걸고 공부해도 지긋지긋한 가난한 집 태생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다. 너에게만큼은 나의 시행착오를 물려주기 싫어서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돈을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어렵게 됐구나. 자존심 상하더라도 시골
학교에서 장학금 받고 열심히 공부해라. 절대 사관학교는 응시하지 마라."
"왜요? 사관학교에 가고 싶은데요."
"이유가 있어. 합격해도 입학할 수 없는 사연이 있어. 더는 알려고 하지 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6·25전쟁 때 전방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받다가 가족 부양
때문에 탈영한 탈영병이었다. 그 이력이 신원조회에서 걸려 큰형의 해군 입대를 막았고, 육군사관학교에 성적으로 합격한 둘째 형의 입교를 막았다. 아버지의
탈영은 아버지 혼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들들에게까지 흘러내린 것이었다.
* * *
대학에 낙방했다.
처음으로 아버지, 어머니에게 손을 벌렸다.
"재수하려면 노량진 학원 등록금 70만 원이 필요합니다."
"대학에 가봤자 매년 등록금과 수업료를 어떻게 만들어 낼 거냐. 생활비는
어떻게 할 거고. 그냥 이참에 기술 배워서 일하고 살아라. 먹고
죽을 돈도 없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딱 한 번만 제 장학금으로
산 돼지가 소가 됐으니 소 팔아서라도 70만 원만 해주세요."
콧방귀도 안 뀌는 냉소적인
비웃음을 보며 절망했다.
그날 밤 무작정 영등포행 기차를
탔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부천 역곡의 단칸방에서 자취하는 다섯째 형을 찾아 상경했다.
서울로 올라가면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홀로 걸어온 삶이었다. 스스로 개척하는
수밖에.
기차는 어두운 평야를 달렸다. 창밖으로 김제의 들판이 사라졌다. 그 들판이 어릴 때는 감옥처럼
느껴졌는데, 막상 떠나는 순간에는 가슴이 먹먹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보였다.
만경평야의 어둠이, 오래도록 창밖에 있었다.
— 제2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