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붉은 흙에서 시작된 삶
1970~1982년
"가난은 결핍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첫 번째 스승이었다."
— 화광동진
제1장. 붉은 흙의 집
전라북도 김제. 나는 거기서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산이 많은 나라에서 사방이 탁 트인 지평선이란 드문 것이다.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만경평야. 끝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너른 들판. 가을이 되면 그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어릴
때는 그것이 얼마나 드문 풍경인지 몰랐다. 그냥 내가 사는 곳이었다.
그러나 황금 들판의 한 뼘도
우리 것이 아니었다.
집은 두 칸짜리 흙집이었다. 겨울이면 문틈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어 이불 끝을 파고들었다. 마당
한편 아궁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하루가 시작됐다. 그것이 내 첫 번째 풍경이었다.
1970년. 나는 이 집에서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6남 1녀의 막내. 이름은
주광현(朱光鉉). 붉은 흙에서 태어나 빛을 향해 달리는 사람. 쉰이 넘어서야 그 이름의 뜻을 제대로 들여다봤다. 그때는 그냥 이름이었다.
* * *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셨다.
가족 중에서 가장 말이 없으셨다. 밥상에서도, 저녁에 마루에 앉아서도 거의 말씀을 안 하셨다. 어머니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시면 "음" 하고 대답하시거나 그냥 계속 드시거나. 말 없는 사람의
무게가 있다. 그 무게가 방 안을 채웠다.
명절이 되면 막걸리를 한 잔, 많으면 두 잔 드셨다. 그러면 조금 입이 풀리셨다. 형들에게 어릴 때 이야기를 하시거나, 자신이 젊었을 때 어땠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런 날이 좋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삶은 노동이었다. 쉬는 날이 없었다. 몸이 멈추면 모든 것이 멈춘다. 아버지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멈추지 않으셨다.
* * *
어머니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됐다.
체구가 크고 키도 있는 분이셨다. 몸도 실하셨다. 그 큰 몸이 하루에 하는 일의 양은 엄청났다. 아침밥을 짓고, 아이들 깨우고, 도시락
싸고, 학교 보내고. 겨울에는 찬물에 손을 담가 빨래를 비비셨다. 그 손이 터서 빨개지던 것이 기억난다.
자식이 일곱이었으니 입히고
먹이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옷은 위에서 아래로 물려받는 것이 기본이었다. 형들이 입다가 작아진 옷이 내게 왔다. 색이 바래고, 어딘가 기운 자리가 있고, 소매 끝이 해진 옷들. 막내인 나는 새 옷을 거의 입어본 적이 없었다. 불만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가장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다. 국민학교 1학년 겨울 저녁이었을 것이다. 형들은 각자 자리에 있고 나만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부뚜막
앞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계셨다. 불빛이 어머니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나는 그 옆에 앉아 불을 바라봤다. 한참 있다가 어머니가 나를 보시더니
뭔가를 꺼내셨다. 군고구마였다. 아궁이 재 속에 넣어 구운
것이었다. 뜨거운 것을 조심하며 껍질을 벗기고 내 손에 쥐어주셨다.
"다 먹어."
그게 다였다. 다른 말이 없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 고구마가, 그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었다.
제2장. 까막눈 소년
국민학교 1학년. 나는 한글을 못 깨친 채로 입학했다.
다들 유치원에서 이미 한글을
떼고 들어온지라 수업을 따라가기에 힘이 부쳤다. 칠판의 글씨는 그림처럼 보였다. 선생님이 적는 글씨는 마치 다른 나라 말처럼 느껴졌다. 친구들은
책을 읽었지만 나는 글자를 외우는 흉내만 냈다.
성적은 항상 꼴찌에서 놀았다. 오로지 달리기와 몸을 놀리는 것만 친구들보다 앞섰다.
그러나 꼴찌보다 더 힘든 것이
있었다.
반 학생들이 다 체육복을 갖춰
입고 있는데 나만 홀로 때꾸정물 나는 평상복, 단벌신사였다. 체육
시간이면 혼자만 그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뭔지 어린 나도 알았다.
학교는 좋았다. 마음껏 떠들고 뛰어놀 수 있는 그곳이. 집에서는 늘 조심해야 했지만
학교에서만큼은 달랐다. 그 학교가 내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하지만 글자를 모른다는 것은
그 학교에서도 나를 작게 만들었다. 작고, 느리고, 뒤처진 아이. 그것이 내 첫 번째 학교생활이었다.
* * *
3학년 초여름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밤에
참외 서리를 갔다. 설익어 먹지도 못하고 참외밭을 망쳤다. 다음
날 참외밭 주인이 쫓아왔다. 아버지가 두 손이 달도록 빌었다.
그날 밤 혼날까 봐 벌벌 떨며
잠 못 자는 나에게 아버지는 끝내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다. 다음 날 아침에야 한마디를 꺼내셨다.
"어떻게 클려고 공부는 안 하고 말썽만 피우냐. 그러다가 아버지
꼴 난다. 공부 안 하려면 학교 때려치우고 아빠 따라다니며 기술이나 배워라."
학교를 때려치우라고?
나는 학교가 좋았다. 그런데 못 가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날부터 무언가가 달라졌다. 아버지가
텃밭 일을 시키기 전에 밥도 안 먹고 새벽에 먼저 학교로 뛰어갔다. 수업이 끝나도 자습하며 해가 질
때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러니였다. 공부를 하게 만든 것은 선생님도, 학원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그 한마디였다. 위협이 동기가 됐다. 학교를 잃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연필을 잡게 했다.
제3장. 육성회비의 손바닥
매달 그날이 돌아왔다.
육성회비를 내는 날이었다. 선생님이 명단을 불렀다. 돈을 못 낸 아이들의 이름이 차례로 불렸다. 내 이름이 불리면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앞으로 나갔다. 손바닥을 내밀었다.
찰싹—
회초리가 내려쳤다. 그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아팠다. 손이 빨개지고 얼얼했다. 그러나 더 아픈 건 다른 것이었다. 돈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 취급을 못
받는 것이 더 아팠다. 아이들 앞에서 세워지고, 맞고, 그 자리를 참아야 하는 것.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형들도 중학교 중퇴하고 직업훈련소 다니며
일자리 찾아 타지로 나간 터였다. 뻔히 사정을 아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나.
그렇게 매달 참았다. 그 수치심을 참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겠다고. 가난이 나를 규정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그 다짐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됐다.
* * *
3학년 가을날 토요일이었던가.
동네 동무들과 쓰레기처리장에서
쓸 만한 것을 줍기 위해 청소차가 오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서주아이스 공장에서 나온 쓰레기차가 올
때는 축복받은 날이었다. 불량품 아이스크림이 잔뜩 실려 나오는데, 녹아
질질 흐르는 것들 사이로 아직 덜 녹아 형태를 유지한 차갑고 달콤한 것들이 있었다. 그것을 찾아 뒤적거리는
아이들의 쟁탈전은 전쟁터와 다를 것이 없었다. 손과 입에 더덕진 서로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깔깔거리며
웃었던지.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제4장. 박현묵의 체육복
그런 내게 체육복을 사준 아이가
있었다.
반장 박현묵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보건소 공무원이었다. 어느 날 새 체육복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 입어."
그게 다였다.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조금만 더 컸더라면 자존심
때문에 안 받고 거절했겠지만, 그때는 처음으로 새 옷을 입는다는 그 기분에 마냥 좋았다. 뽀얗고 반듯한 새 체육복. 그것을 받아 들고 얼마나 설렜던지.
그 체육복 차림으로 등하교를
했다. 체육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그 옷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운동회 날. 달리기 전 종목에서 1등을 했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땅이 발을 밀어내고, 결승선을
끊는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후로 체육복이 평상복이
되었다.
박현묵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냐. 그 체육복 한 벌이 내게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너는 알고 있을까. 보고 싶다.
* * *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돈이 아니었다. 체육복 한 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해준 것은 달랐다. '너도 다른 아이들과 같다'는 것.
'너도 뛸 수 있다'는 것. 어린아이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말인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제대로 알았다.
나는 그 체육복을 입고 처음으로
마음껏 달렸다. 달리는 동안만큼은 글자를 몰라도, 도시락이
없어도, 육성회비가 밀려도, 가난이 따라잡지 못했다. 달리는 동안만큼은 내가 1등이었다.
제5장. 운동장의 날개
달리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사라졌다.
까막눈도, 손바닥의 통증도, 수치심도. 발이
땅을 박차는 순간부터 다른 세상이 열렸다. 앞만 보고 달리면 됐다. 그것만큼
단순한 것이 없었고, 그것만큼 자유로운 것도 없었다.
운동회 날이면 온 학교가 들썩였다. 선생님들도, 구경 나온 부모들도.
하얀 체육복을 입고 출발선에 섰다. 총성이 울렸다. 달렸다. 결승선을 끊었다.
그날 처음으로 아이들이 내
이름을 불렀다. 박수가 쏟아졌다.
꼴찌에서 놀던 그 아이가 달리기만큼은 1등이었다. 그 경험이 내 안에 무언가를 심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것. 열심히 하면 앞으로 갈 수 있다는 것.
공부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달리기처럼.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면 되는 것이라고.
* * *
3학년 가을부터 성적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4학년, 5학년, 6학년을
지나며 다 따라잡았다. 1등은 못 해도 전교 10등 안에서
항상 유지됐다. 돈 많은 집안 친구들이 시험 볼 때 커닝을 조건으로 완전학습, 다달학습, 전과를 사줬다. 공부가
권력이고 힘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체감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니 밥 사주고 용돈
주는 친구가 따랐다.
꼴찌에서 시작한 아이가 그렇게
올라갔다. 한 칸씩, 한 학기씩.
제6장. 솥따요
아버지는 솥땜쟁이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기술을 이어받아 생계의 수단으로 하셨던 일이었다. 가마솥, 양은솥, 무쇠솥. 금이
가거나 구멍 난 것을 고쳐주셨다. 고정된 수입은 없었다. 솥이
망가지는 날과 아버지가 굶는 날은 반비례했다.
국민학교 6학년 초여름 어느 일요일이었다.
아버지는 커다란 짐자전거에
솥 때우는 도구와 재료를 하꾸짝에 담아 실었다. 나는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논으로 바둑판이 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가 목청을 높이셨다.
"솥따~요~에~ 솥따요! 솥따~요~에~ 솥따요!"
구성진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아부지, 근디 이게 무슨 노래래요?"
"이놈아! 솥 때우라고 손님 모으쟎녀."
"근디 솥을 때우는디 왜 솥을 따요? 솥을 사는 것도 아니고
솥을 잃은 것도 아니고, 쌈치기하는 것도 아닌디..."
"에끼 이놈아. 나도 모르것다. 왜 할아버지가 그렇게 솥따요라고 했는지. 그냥 할아버지가 했던 것
그대로 따라한겨."
"아부지도 뜻도 모르고 따라한거라구요? 에구구."
마을 큰 기와집 너른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들이 솥과 냄비를 들고 나왔다. 아버지는
화로와 풀무를 배치하고 갈탄에 불씨를 쑤셔 넣고 도가니를 올렸다.
"어여 풀무 돌려. 불 꺼질라!"
"네, 아부지."
열심히 풀무질을 했다. 불꽃이 빨간빛에서 파란빛을 지나 백색이 될 때 도가니 안의 쇳물이 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흑연 숟가락으로 쇳물을 떠서 솥 밑바닥에 도장 찍듯 꾹 눌러 붙였다.
"와! 아부지. 어떻게
쇳물이 솥에 껌딱지처럼 꽉 붙는데요?"
"몰러.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대로 하는겨."
"아부지는 천재여요. 천재."
제7장. 아버지의 사모곡
어둠이 몰려올 때까지 일을
마치고 쌀과 보리, 감자, 닭을 대가로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자전거를 끌며 또
흥얼거리셨다.
"솥따~요~에~ 솥따요!"
"아니 아부지, 일 다 끝났는디 또 그 노래를 부른데요?"
"허~어. 아빠도
아빠의 아빠가 보고 싶구나. 이렇게 부르면 할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단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한참
말이 없었다.
어두운 논두렁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옆모습을 봤다. 그 자전거 위에 쌓인 쌀과 보리와 감자가, 오늘
하루 아버지가 버신 것이었다. 그 짐을 끌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당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계셨다.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말로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그 흥얼거림으로
가르쳐 준 것이었다. 떠나간 사람도 이름을 부르면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가진 것이 없어도, 하루를 마치는 길에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
* * *
그 길을 걸어오면서 아버지의
손을 처음으로 오래 들여다봤다.
굳은살이었다. 손바닥 전체가 가죽처럼 두텁고, 마디가 굵었다. 솥을 두드리고 인두를 잡은 손. 보따리를 들고 전국 장터를 떠돌아다닌
손. 손등의 혈관이 힘줄처럼 솟아 있었고, 손금 사이사이에
세월이 박혀 있었다.
"아부지, 손 아프지 않아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잠시 후에 짧게 말씀하셨다.
"괜찮다."
그것이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사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그 말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눌려 있는지를
어린 나는 몰랐다. 오래 지나서야 알게 됐다. 아버지의 '괜찮다'는 '참는다'는 뜻이었다는 것을.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전국을
떠돌아다니셨다. 눈이 쌓이면 솥 고치는 일도 줄었다. 그때
아버지는 보따리를 싸셨다. 토끼 가죽, 족제비 가죽. 그것을 싼값에 사서 비싼 곳에 가져가 파는 일이었다. 충북으로, 경북으로. 집에 안 오시는 날이 길어질 때는 어머니가 말씀이 없으셨다. 아이들은 눈치로 알았다. 아버지가 아직 멀리 계신 것을.
가족을 먹이기 위해 가족 곁을
떠나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방식이었고, 그 시대 가난한
아버지들의 방식이었다.
제8장. 국민학교 상장 26개
국민학교 6년 동안 상장을 26개 받았다.
꼴찌에서 시작한 아이가 그
상장들을 모았다. 한 장씩, 한 학기씩. 처음에는 운동 상장이었고, 그 다음에는 학업 상장이 따라왔다. 쓰레기통에서 주운 책 한 권을 붙잡고 공부했던 아이가, 결국 그
학교에서 손에 꼽히는 학생이 됐다.
상장이 의미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증명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의 증명. 가난이 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의 증명.
* * *
6학년 말, 중학교 진학 상담이 이루어졌다.
성적으로는 지역 명문인 공립
김제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안 좋아 집에 가깝고 장학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립
재단 김제북중학교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다. 학비야 장학 혜택으로 면제를 받았지만 육성회비와 용돈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건축설비 하는 아저씨들을 따라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현장 데모 알바를 나갔다. 내가 쓸 돈은 내가 벌어야 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 * *
김제 만경평야. 지평선이 보이는 그 들판에서 나는 자랐다.
황금 들판의 한 뼘도 우리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솥을 때우며 전국을 떠돌았고, 어머니는
찬물에 손을 담가 빨래를 비볐다. 나는 한글도 모른 채 학교에 들어갔고, 매달 손바닥을 맞았고, 체육복 한 벌에 세상을 얻었다.
그 가난이 나를 부쉈는가.
아니었다. 그 가난이 나를 달리게 했다. 빠르게, 멈추지 않고. 그것이 내 첫 번째 스승이었다.
이제 그 달리기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쓰기 시작한다.
— 제1부 끝 —